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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노 아니?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강보석 교수님)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1-01-19 14:02:54
  • 조회수 4157

https://kosua.postech.ac.kr/ckfinder/userfiles/files/20274_15.pdf

방사광이용자협회에서 발간하는 '방사광 과학과 기술'에 나노공학과 강보석 교수님의 글이 게재되었습니다.


https://kosua.postech.ac.kr/Board.ksa?method=boardList&pageMode=home&brd_id=kosua_magazine&top=3&sub=1&sub2=0&sub3=0

위 사이트 방사광 과학과 기술 제27권 4호[겨울호]입니다.



박사 학위 기간 때 가장 가슴 떨렸던 샘플 측정의 순간을 기억한다. 실험을 위해 포항방사광가속기(이하 가속기)를 방문하던 날은 보통 주말이었다. 연구실 누군가는 주말에 배정되는 가속기 스케줄에 불만을 표했지만 난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파래서 가속기 건물의 한쪽 끝이 캔버스 위에 그려진 듯 보이는 날이었다. 놀러가면 딱 좋겠다 싶은 그런 날. 긴 교육 끝에 얻은 방사선 작업종사자 겸 상시 출입자 자격 덕분에 가속기 뒤편에 여유롭게 차를 대고 후문으로 들어섰다. 이름이 적힌 개인용 피폭 선량계의 바코드를 찍자 신비의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듯 유리로 된 자동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먼저 가속기 특유의 묵직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도시 변두리의 공장에서 나는 듯 무겁게 울리는 기계음과 오래된 공기 내음이 났다. 그 유리문을 지날 때면 신선을 쫓아 무릉도원을 염탐하던 사내마냥 현실 세계를 뒤로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빔라인 책상 위에 가방과 샘플을 내려놓고 이번 분기에 바뀐 모습을 체크하다 보면 매니저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실험의 시작을 깨닫게 되곤 했다. 매니저 선생님께서 디텍터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정하시는 동안 샘플을 담은 포장지를 벗기고 샘플들을 정성스럽게 면봉으로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어떤 재밌는 패턴이 나올까.


그날의 고분자 박막은 무언가 달랐다. 고조된 기분으로 샘플을 스테이지에 올려두고 정렬한 후 측정을 시작했다. 0.1초의 간이 스냅샷에서 흑백으로 그려진 CCD 데이터 창은 측정범위를 뚫을 듯 강렬한 높이의 이중결합 피크를 보여주었다 - 일반적인 전도성 고분자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회절패턴. 그 고분자 소재로 n형 트랜지스터를 제작해 7 cm2/ Vs의 전하이동도가 나올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몸을 감쌌다. 전하이동도 7 cm2/Vs의 전기 데이터를 얻을 때 따라다니며 실험을 배우던 연구실 후배에게 지금 보고 있는 커브가 (그 때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결과 중 하나라고 얘기했었다. 학위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동안 많은 샘플을 밤세워 측정 할 때에도 한번도 본적 없는 그런 종류의 패턴이었다. 내가 사용한 첨가제가 고분자 결정을 완벽히 제어해 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 결과가 좋은 논문이 될 거라는 연구자로서의 직감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나비가 춤추듯 콩닥임이 되었고, 몇 해 전 방사광이용자 연구발표회에서 선배를 대신해 수상하던 때가 떠올랐다.

   

커다란 학회장 연단 한가운데에 올라 콜로세움을 닮은 청중석을 향해 인사했다. 해외에 박사후연구원으로 나간 연구실 선배를 대신해 수상하는 자리였지만 마치 내가 상을 받는 마냥 자랑스러웠다. 그 해 지도교수님을 대신해 같은 자리에서 발표도 했다. 큰 회장에서 해보는 첫 발표가 낯설고 학회에 온 친구가 한산한 청중석 한가운데 앉아있어 토할 듯 떨렸다. 발표 중 한 노신사가 질문해줬을 때에는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발표가 끝나고 친구가 마치 교수 같았다고 했을때 기분이 묘했다. 그 이후로 가속기는 친구이자 연인 같은 파트너가 됐다. 빔 스케줄이 되면 가능한 많은 것들을 가속기를 통해 들여다보고 내 실험이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빔라인에 앉아 그냥 빈 허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 커다란 기계속에 들어와 있으면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것 마냥 으스대고 싶고 그랬으니까.

 

가속기와 몇 해를 함께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마치 연인에게 프로포즈 받은 듯 가슴이 몹시 요동쳤다. 당장의 구조해석이야 어찌 됐든 간에 일단 데이터가 사라지면 안 됐다. 마우스를 움켜쥔 손을 부들거리며 데이터를 usb 메모리에 옮겨 담고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한 해 전 비가 몹시 오던 날 밤, 결과를 더 빨리 확인하고 싶어 택시를 타고 실험실과 가속기를 밤새 오가며 실험할 때 보다 더 큰 흥분감이었다. 내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나올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데이터지만 뭔가 중요한 발견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실험이 끝나고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해 일주일을 매달렸다. 왜 이리도 많은 피크가 보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주사슬의 구조가 다른 두 고분자가 어찌 이리도 비슷한 결정구조를 보여줄 수 있는지도 당최 알 도리가 없었다. 마치 삼각형과 사각형으로 된 벽돌을 쌓았는데 우연히 거의 같은 모습의 상아탑이 된 것 같았다.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DFT 계산을 통해 이론적인 값들을 얻어 비교해보며 공상에 잠겼다. 연구실 미팅을 하던 날, 뒷좌석에 앉아 챙겨온 논문의 뒷장에 결정구조를 끄적여 보던 중 불현듯 아이러니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논문을 완성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논문은 이듬해에 해당 저널의 표지논문으로 선정됐고 내게 여러 상을 안겨주었다. 그 논문의 동료심사용 편지는 몹시 추웠던 보스턴 재료학회 기간에 지도 교수님과 호텔 복도의 벤치에 쪼그려 앉아 완성했던 게 생각난다. 그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임용됐다. 학위 기간 때보다 몸은 멀어졌지만 가속기는 여전히 고향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이번에 주신 신진학술 자상은 아마 앞으로도 가속기와 살갑게 연구해나가라고 주신 격려라 생각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빛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내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거울을 본다면 거울 속 내 모습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 물질속으로 들어간 빛은 원자 사이의 배열을 느끼며 간섭을 하고 회절무늬를 나타낸다. 물질 속으로 들어간 빛은 자신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허치 밖의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최후의 질문에서는 엔트로피의 최대점에서 전 우주가 고요히 얼어붙어 갈 때 홀로 남은 멀티백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빛이 있으라. 방사광가속기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앞날에 빛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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